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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밑줄 긋는 남자> 카롤린 봉그랑(이세욱 옮김)


[서평] 밑줄 긋는 남자 

카롤린 봉그랑 | 이세욱 옮김
열린책들 2000.10.01



들어가며 : 책에 무언가를 표시하시나요?


 어렸을 때 책을 읽을 때는 무언가를 기록하거나 밑줄그을 필요가 없었기도 하고
집에 꽂혀있는 책도, 도서관에 있는 책도 혼자 보는 것이 아니기에 배려하는 차원에서?
또 내 책도 무언가 더럽히는 것 같아서, 다시 볼 때 생각이 갖히거나 방해받을 것 같아서 책을 깨끗하게 사용했던 것 같다.

 내가 책에 무엇인가를 표시하기 시작한 때는 고등학교 때였는데, 내가 정말 좋아했던 독서토론 선생님께서 어느 날 신이 난 목소리로 책을 더럽히며 읽는 쾌감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 이후로 나도 그 선생님을 따라 용기내어 책에 무엇인가를 적어보고, 마음에 와닿은 구절에 밑줄을 긋기 시작했다. 책을 사는 재미도 덤으로 얻었다.

 그런데 흔적이 묻어있는 책을 누군가가 본다는 것은 새로운 차원의 일이다. 그것은 남의 일기장을 훔쳐보듯,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만남이다. 책을 읽는 사람의 사고방향에 큰 영향을 미치기에 지침서이기도 하며 토론의 장을 열어주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도서관에 있는 책에서 밑줄을 발견하는 <밑줄 긋는 남자>의 설정은 파격적이며 스릴있고 로맨틱한 사랑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우연처럼, 그러나 필연같이

 <밑줄 긋는 남자>의 주인공인 콩스탕스는 자신이 맺고 있던 사랑 연인 관계에 따분함과 질림을 느끼려던 찰나, 도서관에서 우연히 빌린 책에 "당신에게 더 좋은 책이 있습니다"라는 낙서를 보게 됐다.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 했지만 책의 마지막에는 도스또예프스끼의 <노름꾼>이 적혀 있었다. 

놀랍게도, 소설 속 이방의 여인도 나처럼 시월 생이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듯한 그 귀여운 아가씨를 상상해 보세요. 이상한 나라에 온 앨리스를 말이에요.

그리고 한참을 더 가서.

남에게 가르쳐 줄 만한 새로운 것을 갖고 있고, 그 새로운 것을 가르쳐 주는 데서 행복과 평온을 찾는 사람들의 숨가쁜 미소. 그 아가씨는 곧잘 그런 표정을 짓곤 했어요.

 자신이 낙서했다고 도서관 사서에게 오해받지 않을까 고민하면서 책을 반납하고, 미지의 그가 추천한 <노름꾼>을 읽자 여러 밑줄과 낙서를 발견하게 된다. 마치 하나의 이야기처럼 밑줄 쳐져있는 글은 그의 감정을 대변하는 것 같았으며 신기하게도 콩스탕스를 겨냥이라도 한듯 자신을 향한 사랑의 메세지가 이어졌다. 그리고 다음 책으로, 또 다음책으로 이어지게 된다. 결국 콩스탕스는 도서관에서 그 남자를 찾아나가기 시작한다.

집으로 걸어오는 동안 나는 거리에 있는 모든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이야. 저 사람은 아니야. 저 사람이야. 저 사람은 아니야. 문득 영화 <로슈포르의 아가씨들>의 마지막 장면에서 랑시앵이 델핀에게 한 짤막한 대사가 생각났다. "그는 파리에 있어요. 그리고 그 시인 말마따나 당신들처럼 서로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파리는 아주 작지요."


 책을 요약해볼 때 책에서 마주한 남자를 상상하고 대화하려고 하며 책을 찾아가는 여정이며 그 대상이 일상으로 들어왔을 때 느끼는 감정도 잘 묘사해놓았다. 또한 책에 나와있는 모든 책과 인용구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점을 볼 때 <밑줄 긋는 남자>는 잘 짜여진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지도 모르는 채, 상상만으로. 책에 나와있는 대사만으로 메세지를 전하는 것은 은밀하고 비밀스럽다. 상대방의 답을 듣기 위해 기다려야 하는 애틋함은 덤. 그러나 한편으로는 숨기고 기다려야 한다는 방법과는 다르게 그 안에 담겨있는 내용만큼은 명료하고 강렬하게 표현할 수 있다. 서로가 상대방의 생각하는 마음을 가득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생각만으로도 천국과 지옥이 교차하는 짝사랑의 즐거운 상상에 푹 빠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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