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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상군열전 논평 - 상군의 정치적 죽음과 법적 안정성 확립

 

<사기 상군열전 논평>

상군의 정치적 죽음과 법적 안정성의 확립

 

 경제협력개발기구(OECD)'한눈에 보는 정부 2015'(Government at a Glance 2015) 보고서에 따르면 2014년 기준 한국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는 34%로 매우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뉴스에는 불륜과 살인, 성폭행, 비리와 같은 보도가 많이 보이지만, 국민 10명 중 7명은 이 사건들에 대한 정부의 태도, 반응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쯤 되니 사마천의 <사기>에 세력을 키워갔던 나라들 중 법이 정직하게 집행될 것이라는 믿음을 주었던 진나라의 상군의 개혁을 들을 때면 묘한 쾌감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사실 사마천은 상앙에 대해 박한 평가를 했고 법가 정치에 대한 전반적인 부정이라고 할 수 있다. ‘천성이 각박한 사람과 더불어 공자 건에게 형벌을 가한 일을 가리켜 인정머리 없음을 보여 준다라고 평한다. 인격적인 부분에서의 결함을 적나라하게 표현했고 결국 진나라에서 악명을 얻게 된 것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라며 상앙의 최후와 연결 지어 표현했다. 또한 이후에 내려오는 논평 중 진사도의 상군론에서는 선비가 선()을 행하여 일생을 마치면 그 선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니, 악을 행할 경우도 또한 그러하다.”로 시작하여 여러 가지 이유로 상앙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 비판들은 아래와 같은 이유에서 적절하지 못하다.

 

 첫 번째로 상앙이 비판받는 이유는, 먼저 진나라를 성장시킴으로 인해 제후를 겸병했지만 이로서 진나라가 망하게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적절하지 못하다. 난국 시대에 진나라가 성장할 수 있는 길은 국민에게 자각적 적극성을 가지게 하는 것, 독일의 유명한 법학자 라드부르흐가 법의 3대 이념으로 말한 법적 안정성의 확립에 있었다. 이를 위한 상앙의 탁월한 예를 살펴보자.

 

 “이리하여 법령은 작성되었으나 아직 포고하지는 않았다. 백성들의 불신을 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3()이나 되는 나무를 국도(國都)의 저잣거리의 남문에 세우고, 모인 백성들 중에서 "이것을 북문으로 옮겨놓을 수 있는 자에게 10()을 준다"라고 하였다. 백성들은 이것을 이상히 여겨 옮기지 못하였다. 다시 "옮길 수 있는 자에게는 50금을 준다"라고 하였다. 어떤 한 사람이 이것을 옮기자 즉시 50금을 주어 백성을 속이지 않는다는 것을 밝혔다. 그리고 나서 드디어 법령을 공포하였다.”

 

 법에 대한 신뢰가 깨진 상황에서 이야기하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이야기가 되지 못한다.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더라도 일단 법이 집행된다는 것은 백성들의 신뢰를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1년 뒤 백성들은 국도까지 올라와 법의 부당함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상앙은 이에 대한 확고한 대답을 했다.

 

 “이때 태자가 법을 위반하였다. 위앙은 말하기를 "법이 통행되지 못하는 것은 위에서부터 이것을 위반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법에 따라 태자를 처벌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태자는 군주의 후사로 형벌을 줄 수 없었으므로, 그의 태부(太傅) 공자 건()을 처형하고 그의 태사(太師) 공손고(公孫賈)를 경형(黥刑)에 처하였다.”

 

 상앙의 시대인식은 분명하고 적절했었다. 상앙은 많은 나라들 중 진나라를 강대국으로 부상시켰고 진나라 통일의 기반을 닦았다고 평가받는다. 철저한 준법, 완벽한 치안으로 경제적 발전과 군사력 강화를 이루어냈고 농토 정비, 공정한 부세, 도량형 통일로 물류 개선 등 여러 제도를 통해 초강대국으로 부상했다. 국민들의 자각적 적극성을 통해 법을 지킬 수 있도록 이끌어냈으며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었고 사기 텍스트에는 진나라의 백성들이 매우 만족해했다고 한다. 분명하게 해야 할 것은 상앙의 개혁은 진나라가 통일되기까지의 제도였다. 이 제도는 그 당시 진나라를 유지하고 통일하기까지는 문제가 없었고 성공했으나 통일하고 나서는 새로운 안목이 필요했다고 여겨진다. 통일을 목적으로 부국강병을 이루어내는 법과 통일 뒤 거대해진 국가를 다스리기 위한 법은 다르기 때문이다.(문승환) 추측컨대 통일된 국가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단기간에 강력한 법치를 적용시키는 것이 아니라 각 나라들의 상황에 따른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앞서 백성들에게 신뢰를 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진나라의 멸망은 통일 이후 다스리기 위한 제도를 펼칠 기회를 갖지 못한 상앙의 탓으로 돌리기는 어렵다.

 

 두 번째로 자기 자신이 그 법을 통해 죽었다는 이유로 과유불급, 자기 자신이 부른 화를 입었다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 또한 적절하지 못하다. 먼저, 상앙의 죽음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얽혀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상앙은 정말 가혹한 법에 의해서 처벌된 것일까?

 

군주의 친척이라도 군공이 없으면 심사를 거쳐 족보에 올릴 수 없었다. (중략)

상군이 진나라의 재상이 된 지 10년이 되자, 군주의 일족이나 외척 중에서 상앙을 원망하는 자가 많아졌다.”

 

 사기 텍스트에 보면 왕족 주변으로부터 불발이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진나라 출신 토착 귀족들은 외부인이 나라의 권력을 휘어잡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들이 누리던 특권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태자도 죄를 지으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상황에서 당시 귀족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군주의 친척이라 할지라도 군공이 없으면 심사를 거쳐 족보에 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것을 침해하는 것에 대해 복수하고 싶었을 것이다. 진 목공 이후 진나라의 정치는 원로세력과 왕권의 균형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혜문왕이 이를 회복하고자 한 것도 큰 이유일 것이다. 왕과 신하의 갈등 중 대표적인 사례인 사울과 다윗의 이야기와의 비교를 통해 귀족들의 복수심이 크게 작용했음을 더 명확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사무엘상 18:7-8)


 성서에 적힌 사울과 다윗의 이야기는 신하가 왕보다 인심을 얻을 때 신하에게 나타나는 결과를 보여준다. 사울은 백성들 사이에 자신보다 더 큰 명성을 얻고, 인심을 사는 다윗에게 위기감을 느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이야기가 뒤에 펼쳐진다. 왕보다 더 높아진 신하에 대한 위기감, 그에 따른 숙청은 역사 속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상앙은 이와 달랐다. 조량의 이야기 중 상앙의 법을 더 빠르게 집행한다고 하는 부분이 있지만 이것은 상군을 백성들이 따르고 인심을 얻는다고 보기보다 상군이 만든 제도의 집행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시경에 이르기를 '인심을 얻는 자는 일어나고, 인심을 잃는 자는 망한다'라고 하여 상앙에게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상앙이 왕을 위협할 만큼 인심을 얻지 못했다면 정치적 죽음의 이유가 더 명확해지는데 귀족들이 느낀 불쾌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혜문왕의 개인적인 앙심도 있을 수 있다. 텍스트를 살펴보면 태자를 처벌하고자 하였으나 왕이 말려서 태부 공자 건()을 처형하고 그의 태사 공손고(公孫賈)를 경형에 처하였다고 했다. 자신을 처벌하려 했던 것, 혹은 자신의 스승을 처벌하려고 했던 것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 또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 때 과감한 개혁을 시도하다가 죽음을 당하거나 모함당한 많은 인물과 비교해서 상앙은 자신이 만든 법 안에서 죽었다는 점은 인상 깊다. 그리고 상앙이 죽은 뒤에도 유지되었다. 같은 법가 정치의 대표적인 인물로 이사를 꼽을 수 있다. 상앙이 진나라 통일의 기반을 다졌다면 진나라의 통일을 완성했다고 할 수 있지만, 이사는 결국 자기가 세운 진나라를 멸망시키는데 이르고 만다. 진나라를 부국강병하게 하는데 일조한 뒤에 죽었다는 점은 공통적이나 상앙의 법은 그 후대에도 남아 영향력을 행사했다. 만약 사람들의 비판대로 이것이 터무니없이 각박하여 사람들을 옥죄고 방해했더라면 진나라 출신 토착 귀족들은 그 제도를 왜 엎지 않았을까? 결국 그들조차 상앙이 만든 제도의 이로움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런 정치적 이해가 얽힌 상앙의 죽음을 왜 사마천은 부정적으로 서술했을까? 사마천의 생애를 살펴볼 때 이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채한수의 천천히 걸으며 제자백가를 만나다에서 볼 수 있듯 사마천이 살았던 한 나라 초기 무제 때에는 이미 유가사상이 정치 이념으로 굳어지고 있을 때였으니 그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상군열전을 읽으면 구성이 잘 짜인 스토리를 보는 듯하다. 성공한 어떤 정치가가 도를 넘어 죽었고, 결국 자신이 만든 법에 의해 자멸한다는 이야기, 각박해진 세상으로부터 인의가 회복된다는 이야기로도 읽힌다. 그러나 상앙의 최후를 정치적 맥락에서 바라본다면, 상앙이 이루어 낸 성과나 제도가 지나쳐서 자멸했다는 것처럼 인과적으로 해석해선 안 된다. 또한 이미 깨어지고 불신하게 된 법의 안정성의 확립을 위하여 태자를 처벌하려 했으나 그의 스승을 처벌한 것을 각박하다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 법의 집행과 위엄은 이해관계에 얽힌 누군가에게는 융통성이 없어 보이며 심기에 매우 거슬리게 불편할 수 있다. 따라서 사마천이 말한 그의 각박함은 기존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어르고 달래어 이익을 챙겨주지 않았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뛰어난 법치 정치가, 상앙의 최후에 대해 부정적으로 그려진 것은 지나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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