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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지니어 이야기2] 엔지니어란 누구인가에 대한 역사적 접근과 엔지니어의 탄생
[엔지니어 이야기2] 엔지니어란 누구인가에 대한 역사적 접근과 엔지니어의 탄생

(샤를 드 쿨롱, 위키피디아)


19세기 사회문화적 배경을 통한 공학의 이해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 공학을 실천 지향적이며 과학의 응용분야라고 보는 시각은 과학기술사적으로 잘못된 견해임을 살폈다. 이를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21세기를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공학에 대하여 기존의 편견만으로 한정해서는 안된다.

 다시한번, 과학은 이론 지향적이고 순수한 학문이며 공학은 실천 지향적이고 과학을 응용한 학문이라는 관념이 공학과 과학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기보다 19세기 후반에 자리잡았던 사회문화적 현상으로 파악한다. 기본적으로 18세기 후반에서 1880년대까지 유럽의 주요 국가와 미국에서는 작업장에서 실행된 장인의 기술로부터 전통적인 대학 혹은 신설 기술학교에서 만들어진 '공학'이라는 체계적 학문으로 무게 중심이 이동됐다.

 각국의 엔지니어는 여러 상황적 변화에 따라 위로는 경영자 밑으로는 노동 계급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경우는 최상의 엘리트 영국은 전문가 집단이라기보다 기술노동자, 미국은 육체노동자이면서 화이트칼라에 속하는 노동자였다.

 나라마다 엔지니어에 대한 인식에 차이가 생기는 것이 신기하지 않은가? 이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생각해볼 수 있다.

1. 엔지니어의 사회적 정체성은 왜 국가별로 차이가 나는 것인가?
2. 왜 엔지니어의 사회적 위상과 역할에서 국가적 특이성과 차별성은 영구적인 것처럼 보이는가?
3.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언제 어떤 상황까지 이런 국가적 특이성과 차별성이 지속될까?
4. 공학이라는 과학에 기초한 신생 학문이 여러 유럽 국가와 미국에 널리 정착하는 상황에서는 국가적 특이성과 차별성이 약화하거나 나아가 소멸했을까?


국가적 스타일 : 공학 문화, 시스템, 패턴, 스타일

간략하게 요약하여 국가적 스타일에 대한 맥락만 먼저 이해하자.

프랑스는 이론-연역적으로 공학이 발전하여서 과학계에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예로 쿨롱이 있다. 또 상층부의 국가 엔지니어와 중하츠으이 민간 엔지니어가 뚜렷하게 구별되었다. 그래서 엔지니어 집단 내부에 다양성과 계층화가 진행되었다.

미국은 실험-귀납적으로 공학이 발전하였다.

영국의 공학문화는 자수성가한 기술자들의 사회적 지위 향상 노력을 통해 형성되었다 그러나 강력한 제도의 영향으로 전문 직업인으로 정착하는데 그쳤다.

독일은 19세기 초부터 정부가 강력한 주도권을 쥐고 엔지니어 양성과 수급에 나섰다. 
미국은 프랑스를 모방하면서 사회적으로는 영국식 도제 훈련을 따르는 경향이 있다.


나라간 엔지니어의 탄생

 16세기 초 시작되어 19세기의 도약기를 거치며 공학의 제도화가 이루어졌다. 프랑스는 유럽의 다른 국가들보다 훨씬 빨리 전문학교 설립하여 공학 교육 체제의 역할 모델을 제공했다. 엔지니어들은 기술 관료로써 국가에 봉사했는데, 이성적, 합리주의적 분위기가 팽배했던 계몽주의 시대에서 높은 교육적 성취와 과학 지식으로 만인의 존경을 받았고, 세간에는 공학 교육=엘리트 교육 또는 엔지니어를 엘리트 중의 엘리트로 인식하는 풍토가 조성되었다. 영국의 도제 제도와 대조를 이루며 이론 교육에 집중했던 프랑스의 공학 교육과 국가 엔지니어의 단체 정신은 공익과 애국심에 바탕을 둔 자신들의 직업적 의무를 이행하는데 충실함으로써 높은 도덕적 우월성을 획득하고 지휘관 또는 지도자로서 자신의 책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데 기여했다.

 일반적 인식과 달리 영국의 산업혁명은 엔지니어 집단을 키우지 못했다. 세계 최초의 산업 혁명은 공식적인 엔지니어 양성 교육 기관이 아니라 산업 현장의 숙련 장인들 손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전엔 군사 엔지니어밖에는 없었다. 1770년경 민간 토목 분야에서 전문 기술자가 등장했는데 군사 엔지니어와 구별하기 위해 스스로를 민간 엔지니어라고 불렀다. 이를 엔지니어의 시초라고 봐야 한다.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로서 독립을 선언한 1776년 이전까지는 엔지니어는 커녕 충분한 수의 장인 기술자도 확보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아예 엔지니어로 볼 수 있는 직업군이 존재하지 않았다. 추후 엔지니어 집단은 신분상승 시도를 성공하지 못하고, 소수의 사업 엘리트와 기술적 파트너가 인적 결합을 통해 성장하는 형태를 띠게 된다.


출처 : 근대 엔지니어의 탄생, 김덕호 외, 에코리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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